기동전사건담 섬광의 하사웨이 키르케의 마녀 (사전준비, 영상미, 건덕서비스)
건담을 거의 모르는 상태로 극장에 들어갔다가 당황한 분 계십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유튜브 숏츠로 크시 건담 영상 몇 번 보고 "로봇 멋있네" 하고 티켓을 끊었는데, 막상 스크린 앞에 앉으니 고유명사 폭탄이 쏟아지더군요.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 키르케의 마녀'를 제대로 즐기려면 솔직히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 글은 그 준비법과, 막상 보고 나서 든 솔직한 생각을 담은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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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 키르케의 마녀 공식포스터 |
사전준비 없이 가면 팝콘만 먹다 옵니다
이 영화는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원작 소설로 치면 중권에 해당하는 위치입니다. 전편인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 1편'을 보지 않았다면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상황이 아무런 설명 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초반 20분은 그냥 멍한 상태로 흘려보내게 됩니다. 저는 극장 가기 전날 밤을 통으로 날려가며 원작 소설 줄거리와 우주세기(UC, Universal Century) 연표를 정독했습니다. 우주세기란 건담 시리즈의 핵심 세계관 설정으로, 인류가 우주 식민지로 이주하기 시작한 시점을 원년으로 삼는 가상의 역사 체계입니다. 이 배경을 모르면 왜 지구에 사는 사람이 죄악시되고, 왜 연방 정부가 증오의 대상인지가 전혀 와닿지 않습니다.
주인공 하사웨이 노아는 브라이트 노아(1년 전쟁 이래 최전선에 섰던 연방군의 함장)의 아들로, 25세가 된 시점에 마프티 나비유 에린(Mafty Navue Erin)이라는 테러 조직의 수장을 자칭하고 있습니다. 마프티 나비유 에린이란 하사웨이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이름이자 조직 그 자체를 가리키는 상징적 칭호입니다. 이런 설정을 모르고 가면 "주인공이 왜 테러리스트야?"라는 의문만 생기고 감정 이입이 끊깁니다.
제가 직접 느낀 사전준비의 효과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우주세기 세계관 기초 파악: 연방 정부와 지구 거주 기득권층의 구도를 미리 이해해두면 초반 대사들이 훨씬 선명하게 들립니다.
- 1편 줄거리 확인: 하사웨이와 기기 아미가 어떻게 만났는지, 케리아 데이스와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인물들의 감정선을 절반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 역습의 샤아 줄거리 파악: 후반부에 아무로 레이와 샤아 아즈나블의 망령이 직접적으로 소환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두 인물을 모르면 그 무게감이 전혀 전달되지 않습니다.
건담 입문자라면 건담 공식 사이트(gundam.info)에서 우주세기 작품 연표를 한 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극장에서 길을 잃는 상황을 꽤 줄일 수 있습니다. 귀찮더라도 이 단계를 건너뛰지 마시길 권합니다.
영상미가 진짜 문제입니다, 좋은 의미로
극장 자리에 앉아 첫 장면이 시작됐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도입부에 모빌슈트(Mobile Suit, 건담 세계관에서 인간이 탑승해 조종하는 대형 인형 병기)가 등장해 사람들을 공격하는 장면이 POV 시점으로 펼쳐지는데, 마치 1인칭 슈팅 게임의 화면처럼 카메라가 뒤흔들렸습니다. 극장 사운드가 가슴팍을 두드리는 수준으로 쏟아지니, 로봇 만화를 보는 게 아니라 전장 한복판에 내던져진 기분이었습니다.
배경 미술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함선 창가에서 바람에 살랑이는 커튼, 지구 환경이 회복 불가능 수준으로 오염된 세계라는 설정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반짝이는 해수면은 실사 카메라로 찍었다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오래전부터 지향해온 '양화(洋畫)적 표현'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양화란 서양 실사 영화의 문법과 리얼리즘을 기준으로 삼는 영화 스타일을 뜻하는데, 이 작품은 그 기준을 넘어서 "실사처럼 보이지만 애니메이션으로만 가능한 화면"을 만들어냈습니다. 제가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싶었던 장면은, 기기가 방을 정리하는 짧은 몽타주 시퀀스였습니다. 전쟁 영화인데 갑자기 청춘 멜로드라마처럼 촉촉해지더니, 그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단, 전투 장면은 상당히 어둡습니다. 에어즈록에서 벌어지는 클라이맥스 전투는 새벽 시간대 설정이라 화면 자체가 매우 어둡게 처리돼 있습니다. 어두운 연출이 등장인물과 같은 감각으로 상황을 파악하게 만들려는 의도라는 시각도 있습니다만, 제 경험상 극장 환경에 따라 로봇들이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윤곽조차 안 보이는 경우가 생깁니다. 과거 TV 시리즈에서 건프라(건담 프라모델, 건담 IP 비즈니스의 핵심 상품) 홍보를 위해 모빌슈트의 세부 디테일을 밝고 선명하게 보여주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입니다. 디테일을 굳이 극중에서 다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단계로 바뀐 것이겠지만, 눈이 피로하다는 인상은 남았습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장면은, 기기 아미가 쌍안경 너머로 레인 에임이라는 파일럿을 응시하고, 레인이 다시 기기에게 응시당하는 장면입니다. 글이나 만화책으로는 절대 전달할 수 없는 섬뜩한 분위기가 화면 가득 퍼지는데, 이런 순간들이 이 영화가 단순한 로봇 액션물이 아니라는 걸 가장 직접적으로 증명합니다. 기기를 연기한 우에다 레이나의 목소리 연기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매력적인 이 캐릭터를 실제 살아있는 사람처럼 만들어줍니다.
건덕 서비스, 하사웨이한테는 짐이었을지 모릅니다
후반부 전개에서 솔직히 제가 가장 당황했던 부분입니다. 하사웨이가 환영 속 아무로 레이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역습의 샤아'에 등장했던 대사를 거의 그대로 읊조립니다. 건덕(건담 골수 팬을 뜻하는 은어)들에게는 소름이 돋는 순간이었겠지만, 저처럼 역습의 샤아를 제대로 안 본 사람 입장에서는 "이 대사가 갑자기 왜 나오지?" 하는 위화감이 먼저 들었습니다.
이 장면이 왜 걸리냐면, 영화 두 시간 내내 공들여 쌓아 올린 하사웨이만의 서사가 있는데, 그 위에 느닷없이 30년 전 샤아 아즈나블의 망령이 덮이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역습의 샤아가 우주세기 건담 서사의 하나의 완결로 기능하는 작품이라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하사웨이는 하사웨이 자신의 드라마가 있는 인물입니다. 샤아가 남긴 언어를 똑같이 반복함으로써 하사웨이의 비극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일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그 선택이 오히려 하사웨이를 아무로와 샤아의 각주(脚注)처럼 만드는 결과로 이어진 것 같아 아쉽습니다. 각주란 본문을 보충하는 부수적 설명을 뜻하는데, 하사웨이는 그 이상의 이야기를 가진 인물입니다.
반면 기기의 각색은 훌륭합니다. 원작에서 기기는 하사웨이와 케네스 두 사람의 운명을 지켜보고 싶다는 관찰자 동기가 더 강하게 드러나는 인물인데, 이번 극장판에서는 기기가 자기 자신답게 살기 위해 움직이는 인물로 재해석됩니다. 이 변화 덕분에 기기라는 캐릭터가 훨씬 현대 관객이 공감하기 쉬운 존재가 됩니다. 폼므 파탈(Femme Fatale,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치명적 매력의 여성 캐릭터)은 실사 영화에서 그려내기가 극히 어려운 유형인데, 이 작품에서는 애니메이션 특유의 과장과 실사적 사실감 사이의 줄타기 덕분에 기기가 스크린 위에서 제대로 살아납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 키르케의 마녀'는 건담 문외한에게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영화입니다. 다만 반드시 1편 줄거리와 우주세기 기초 설정을 확인하고 가십시오. 그 수고를 들이면, 화면에서 퍼져나오는 배경 미술의 아름다움과 두 남녀의 꼬인 감정선이 생각보다 훨씬 깊이 들어옵니다. 3편이 어떤 결말로 마무리될지, 하사웨이가 끝내 자신만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을지 지켜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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