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미널 (기억이식, 정체성, 케빈코스트너)

지난 주말, 숙제를 끝내고 넷플릭스를 뒤적이다가 라이언 레이놀즈 얼굴만 보고 골랐던 영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그 배우가 죽어버렸습니다. '어, 이게 뭐지?' 싶었는데, 거기서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됐습니다. 영화 <크리미널(2016)>은 죽은 CIA 요원의 기억을 살인귀 흉악범에게 이식하면서 벌어지는 추격과 정체성 혼란을 담은 작품입니다.

영화 크리미널의 주연배우들이 전면을 응시한 포스터
영화 크리미널 포스터


기억이식, 말이 되는 설정인가요

영화의 핵심 소재는 기억이식(memory transplant)입니다. 한 사람의 기억과 경험을 다른 사람의 뇌에 직접 옮겨 넣는 기술인데, 현실에서는 아직 불가능하지만 신경과학 분야에서 꾸준히 연구되고 있는 주제입니다. 실제로 네이처(Nature) 신경과학 섹션에서도 기억의 물리적 저장 메커니즘에 관한 연구들이 꾸준히 발표되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 개념을 전두엽(prefrontal cortex) 손상 환자에게 적용하는 방식으로 설정합니다. 전두엽이란 감정 조절, 공감 능력,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뇌의 앞부분입니다. 제리코는 선천적으로 전두엽 기능에 문제가 있어 타인의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psychopath)였습니다. 사이코패스란 반사회적 인격 장애의 일종으로, 공감 능력이 결여되고 충동 조절이 어려운 상태를 가리킵니다. CIA가 이 흉악범을 굳이 찾아낸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전두엽이 이미 손상되어 있으니 새로운 기억이 자리잡기 쉬운 '빈 그릇' 같은 뇌였던 거죠.

제가 직접 보면서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흔한 CIA 첩보 액션인 줄 알았는데, 신경과학적 설정이 생각보다 꽤 촘촘하게 깔려 있더라고요. 물론 현실과는 거리가 있지만, '완전히 말이 안 되는 억지'는 아니었습니다. 덕분에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CIA 지국장(게리 올드만)이 수술 중 제리코가 위독해지는 순간에도 오직 정보 회수에만 집착하는 장면은 꽤 불편했습니다. 핵무기 통제 시스템을 해킹한 해커 더치맨의 행방을 알고 있던 유일한 요원 빌이 테러 조직 헤임달에게 납치 후 사망했고, 그 정보를 되살리기 위해 범죄자의 생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권력을 가진 쪽이 도구가 필요할 때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영화가 꽤 직접적으로 보여준 부분이었습니다.

정체성의 혼란, 제리코는 누구인가요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됐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만약 내 머릿속에 다른 사람의 기억이 통째로 들어온다면, 그 이후의 나는 과연 '나'일까요? 제리코는 탈출 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집의 비밀번호를 자연스럽게 눌렀습니다. 몸이 기억하는 게 아니라, 뇌에 이식된 정보가 그를 이끈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려 하지만, 점점 이식된 기억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며 행동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은 제리코가 빌의 아내를 불쾌한 시선으로 훑다가 갑자기 밀려온 기억에 스스로 멈추는 부분이었습니다. 그 순간 소름이 좀 돋았습니다. 평생 타인의 감정을 모르고 살던 사람이, 남의 감정을 뇌에 주입받으면서 억제되는 장면이라니요. 이걸 케빈 코스트너가 눈빛 하나로 표현했는데, 나이 든 배우라고 기대를 낮췄던 저는 솔직히 부끄러워졌습니다.

이 영화에서 정체성 혼란이 특히 잘 드러나는 장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한 번도 간 적 없는 빌의 집 비밀번호를 자동으로 입력하는 장면 — 기억이 몸보다 먼저 반응하는 순간
  2. 빌의 아내를 보호하려는 충동과 본래의 폭력적 본능이 충돌하며 제리코가 괴로워하는 장면
  3. 딸 엠마를 처음 보는 순간 낯선 감정, 즉 이식된 부성애(paternal instinct)가 깨어나는 장면 — 부성애란 자녀를 보호하고 돌보려는 본능적 감정을 뜻합니다
  4. 자신을 처치하려는 CIA에 협조 대신 빌의 가족을 구하는 선택을 하는 마지막 장면

집에 어린 동생이 있어서 그런지, 엠마를 보면서 제리코가 달라지는 과정이 유독 마음에 걸렸습니다. 부성애라는 감정이 뇌세포 활성화로 생겨날 수 있다는 설정 자체가, 사람의 감정이 결국 생물학적 기반을 가진다는 얘기로도 읽혔습니다. 이 영화가 단순 액션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지점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케빈 코스트너 연기력, 그리고 영화의 아쉬운 점

솔직히 포스터만 보고 '나이 든 아저씨 액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즘 마블 영화처럼 화려한 CG도 없고, 주인공 비주얼도 거의 노숙자에 가까운데다가요. 그런데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케빈 코스트너는 침을 뱉고 욕설을 내뱉던 거친 범죄자가 점차 누군가를 지키려는 사람으로 변하는 과정을, 과장 없이 담아냈습니다. 특히 몸에 총상을 입고도 구급대원을 뿌리치고 빌의 가족에게 달려가는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화면을 쫓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반전도 꽤 쾌감이 있었습니다. 더치맨이 심어놓은 백도어(backdoor)를 통해 헤임달이 발사한 미사일이 그들 자신에게 돌아가는 구조였는데, 백도어란 정상적인 인증 절차를 우회해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도록 숨겨놓은 통로를 말합니다. 제리코가 마스터키를 넘기는 순간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는데, 사실 그 전체가 계획이었다는 게 밝혀지는 순간은 속이 확 뚫리는 느낌이었습니다. IMDb 크리미널 페이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이 영화는 평단보다 관객 반응이 더 좋은 편인데, 그 이유가 이런 장면들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악당 헤임달의 보스가 전 세계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치고는 너무 허무하게 당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치맨 역시 긴장감 있게 등장했지만 후반부에는 비중이 급격히 줄어서 약간 용두사미 같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래도 그런 단점들을 케빈 코스트너의 연기가 상당 부분 커버해 주는 영화입니다. 제 경험상, 기대를 낮추고 켠 영화가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가 딱 그랬습니다.

킬링타임용으로 틀었다가 뒤늦게 인간이 되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에 빠진 주말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기억이 곧 그 사람인가?'라는 질문이 한동안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액션도 즐기고 싶고, 거기에 좀 더 생각할 거리도 원한다면 <크리미널>은 꽤 좋은 선택입니다. 넷플릭스에서 바로 볼 수 있으니, 주말 저녁에 콜라 한 캔 들고 한번 틀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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