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헤일메리 (기억상실, 로키, 아스트로파지)
이 영화를 얼마나 보고 싶었던지 평일 저녁을 거르고, 극장가서 팝콘 큰 거 하나 사들고 혼자 관람을 했었습니다.솔직히 "우주 과학 영화면 중간에 졸겠지" 싶어서 반쯤 마음을 비우고 들어간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몸에 줄 주렁주렁 달린 채 기억상실 상태로 깨어나는 주인공을 보는 순간, 등받이에서 등이 떨어졌습니다. 156분 내내 그 자세로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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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공식포스터 |
기억상실로 시작하는 우주 생존기
주인공 라일랜드 그레이스(라이언 고슬링)는 혼수상태에서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자신이 왜 우주에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급식 튜브를 목에 꽂은 채, 이미 사망한 동료 승무원들에 둘러싸인 상태로요. 기억상실증(Amnesia), 즉 뇌가 특정 기억을 완전히 차단해버리는 상태인데, 영화는 이걸 단순한 설정 장치가 아니라 이야기를 끌어가는 핵심 구조로 씁니다.
그레이스가 조금씩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지구에서의 플래시백(Flashback), 즉 과거 장면이 현재와 교차되며 끼어듭니다. 어떻게 평범한 중학교 과학 교사가 인류의 마지막 희망으로 우주선에 탑승하게 됐는지, 그 전말이 조각조각 맞춰지는 방식입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꼈는데, 이 구조가 사실 굉장히 영리합니다. 관객도 그레이스와 똑같은 속도로 정보를 얻으니까 함께 당황하고 함께 안도하게 됩니다.
라이언 고슬링은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능청스럽게 버티는 연기와, 조용히 무너지는 연기를 같은 얼굴로 해냅니다. 믿었던 가설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깨닫고 "내 말이 다 틀렸고, 모든 게 잘못됐다"며 신음하는 장면이나, 기억도 나지 않는 동료들의 유품만 가지고 추도사를 읊는 장면은 팝콘을 집어 들다 멈추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로키, 입도 없는데 제일 매력 있는 캐릭터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외계인이 나오면 또 지구 침략하는 거 아니야?" 싶었던 분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로키는 전혀 다른 종류의 외계인입니다. 돌멩이처럼 생겼고, 입도 없습니다. 소리로 대화하는 에리드인(Eridian)으로, 타우 세티로 향하는 길에 그레이스와 우연히 마주칩니다.
처음에 둘은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컴퓨터 번역기를 돌려가며 수학과 과학으로 소통을 시작하는 과정이, 방탈출 게임 같은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이 장면에서 가장 몰입했는데, 아무 말도 안 통하는 두 존재가 음파 주파수를 맞춰가며 서로를 이해하려는 모습이 생각보다 훨씬 뭉클했습니다.
로키를 연기한 수석 퍼페티어(Puppeteer) 제임스 오티즈의 공로가 큽니다. 퍼페티어란 인형이나 특수 조형물을 직접 조종해 연기하는 배우를 말하는데, 오티즈는 미세한 손짓과 몸짓만으로 로키의 호기심, 당황, 기쁨을 고스란히 전달합니다. 로드와 밀러 감독이 오티즈의 목소리를 컴퓨터 번역 음성에 그대로 남겨두기로 한 선택도 탁월했습니다. 현장에서의 연기와 최종 결과물이 하나처럼 느껴졌습니다.
입도 없는 녀석인데 농담이 제일 독합니다. 그레이스가 뭔가 실수할 때마다 로키가 특유의 방식으로 찌르는데, 저도 모르게 극장에서 피식 웃었습니다.
아스트로파지, 태양을 잡아먹는 우주 미생물
이 영화의 설정 중 가장 독특한 건 아스트로파지(Astrophage)입니다. 아스트로파지란 우주 공간의 적외선(Infrared) 광선을 에너지로 삼아 번식하는 외계 미생물로, 별의 에너지를 흡수해 태양을 서서히 죽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쉽게 말하면 별을 갉아먹는 세균 같은 것인데, 이게 우리 태양만의 문제가 아니라 은하계 전체 항성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NASA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 공식 페이지를 보면 실제로 과학자들이 외계 항성의 광도 변화를 얼마나 정밀하게 추적하는지 알 수 있는데, 영화의 설정이 터무니없이 허황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작 소설 특유의 "과학적으로 말이 되는 SF"라는 질감이 영화에서도 살아있습니다.
영화에서 아스트로파지가 시각화되는 방식은 촬영 감독 그레이그 프레이저(Greig Fraser)의 공입니다. '듄' 시리즈로 아카데미 촬영상을 받은 그가 이 영화에서도 참여했는데, 적외선 스코프를 통해 보이는 아스트로파지 군집의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소름 돋게 위협적입니다. 빛을 굴절시키고 휘어지게 하는 방식으로 우주 공간에 깊이감을 만들어내는 장면은 극장 화면으로 봐야 제값을 합니다. 아이맥스로 보지 않은 걸 영화관 나오면서 바로 후회했습니다.
그레이스와 로키가 함께 아스트로파지의 약점을 찾아가는 과정은 이 영화의 가장 짜릿한 부분입니다. 서로 다른 행성에서 온 두 존재가 각자의 과학 지식을 합쳐 문제를 풀어가는데, "다름"이 오히려 무기가 되는 이 구조가 원작 소설에서도 가장 사랑받던 지점이었습니다.
장점은 뚜렷하고, 아쉬움도 솔직하게
156분짜리 영화를 보고 나서 솔직하게 정리해보면, 장단점이 꽤 명확합니다.
- 그레이스와 로키의 케미스트리: 이 영화에서 단 하나만 남기라면 이것입니다. 전혀 다른 종의 두 존재가 서로를 존중하며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이 유치하지 않고 진심으로 감동적입니다.
- 라이언 고슬링의 연기: 억울하면서도 능청스럽고, 무너지는 순간에도 과장하지 않습니다. 거대한 우주 배경 속에서 혼자서도 2시간 반을 끌고 가는 힘이 있습니다.
- 그레이그 프레이저의 촬영: 우주와 미생물을 동시에 아름답게 보여주는 화면은 극장에서 봐야 할 이유가 됩니다.
- 3막의 페이스: 후반부로 갈수록 플래시백이 자주 끊기며 우주 서사의 흐름을 방해합니다. 조연 캐릭터들 서사까지 챙기려다 정작 결말이 급하게 처리된 느낌이 듭니다.
- 산드라 휠러의 캐릭터 활용: 에바 스트라트 역의 산드라 휠러는 연기 자체는 좋았지만, 영화가 그 인물에 충분히 투자하지 않아 후반 감정선이 잘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아쉬웠던 건 3막이었습니다. 그레이스와 로키 임무의 클라이맥스가 끝난 뒤에도 영화가 계속 이어지는데, 그 이후가 상대적으로 힘이 빠집니다. 앤디 위어 공식 사이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원작 소설의 구조 자체가 영화로 옮기기 까다로운 방식인데, 그 한계가 후반부에서 결국 드러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 문을 나서는 길에 밤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저 멀리 어딘가에 로키 같은 외계인이 자기 행성을 구하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상상이 절로 들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도 그 여운이 남는다면, 그걸로 충분히 잘 만든 영화 아닐까요.
히어로 영화에 지쳤다면, 이 영화가 그 피로를 꽤 시원하게 풀어줄 겁니다. 과학을 잘 몰라도, 우주에 관심이 없어도, 그레이스와 로키가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 어느 순간 함께 긴장하고 함께 웃게 될 겁니다. 가능하면 아이맥스로 보시길 권합니다. 저처럼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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