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랜드 (팩트, 몰입감, 인간본성)

 

솔직히 고백하자면, 처음엔 별 기대 없이 넷플릭스를 틀었습니다. 300의 주연인 제라드 버틀러!?가 나오길래 배우만 보고, 엄마랑 방 불을 다 끄고 태블릿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영화가 끝날 때쯤엔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습니다. 재난 영화인데도 지구를 구하는 영웅 한 명 없이, 그냥 평범한 가족 한 팀만 따라가는 구조라는 게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영화 그린랜드 공식포스터


팩트: 그린랜드는 어떤 영화인가

2020년 공개된 그린랜드는 지구와 충돌 경로에 놓인 혜성, 즉 지구 접근 천체(NEO, Near-Earth Object)를 소재로 한 재난 SF 스릴러입니다. NEO란 지구 궤도 근처를 통과하거나 충돌 가능성이 있는 소행성·혜성을 통칭하는 천문학 용어로, NASA의 지구 근접 천체 연구 센터(CNEOS)에서 실제로 추적·분석하는 대상입니다. 영화는 이 설정을 배경 삼아, 건축 엔지니어 존과 아내 앨리슨, 소아 당뇨를 앓는 아들 네이트가 미국에서 그린랜드 지하 벙커까지 이동하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주연은 제라드 버틀러, 모레나 바카린, 스콧 글렌이 맡았습니다. 장르는 SF 드라마와 스릴러의 경계에 걸쳐 있습니다. 아마겟돈이나 2012처럼 도시가 화려하게 무너지는 장면보다는, 정부의 선별 대피 시스템인 트리아지(Triage) 방식이 작동하는 과정을 중심에 놓습니다. 트리아지란 원래 의학에서 환자를 긴급도에 따라 분류하는 절차를 뜻하는데, 영화 속에서는 직업군을 기준으로 생존자를 선별하는 방식으로 변형되어 등장합니다.

몰입감: 이 영화가 긴장을 유지하는 방법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예상 밖이었던 건, 긴장감의 출처였습니다. 불타는 혜성 파편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장면보다, 존의 손목 팔찌 한 개가 가족 전체의 생사를 가르는 순간이 훨씬 더 숨을 멈추게 만들었거든요. 영화는 관객의 감정을 끌어올리기 위해 소위 맥거핀(MacGuffin) 기법을 적극 활용합니다. 맥거핀이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지만 그 자체보다는 캐릭터의 행동을 유발하는 소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네이트의 인슐린이 그 역할을 합니다.

인슐린(insulin)은 혈당을 조절하는 호르몬으로, 제1형 당뇨 환자는 신체에서 이를 생산하지 못해 반드시 외부에서 주사로 보충해야 합니다. 제 친한 친구가 매일 인슐린을 맞는 친구라서 그런지, 공항 아수라장에서 약이 든 가방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정말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으로 얼마나 "제발 빨리 찾아라!"를 외쳤는지 모릅니다.

내러티브 구조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영화는 존과 앨리슨 두 사람의 동선을 번갈아 보여주는 교차편집(Cross-Cutting) 방식을 사용합니다. 교차편집이란 동시에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빠르게 교차해 보여줌으로써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편집 기법입니다. 두 사람이 따로 떨어져 각자의 위기를 헤쳐나가는 동안, 관객은 두 배의 불안을 동시에 안고 가야 합니다.

인간본성: 이 영화가 진짜 무서운 이유

영화를 보고 나서 엄마랑 가장 오래 이야기를 나눈 부분이 이 대목이었습니다. 떨어지는 혜성이 무서운 게 아니라, 팔찌 하나를 빼앗으려고 아픈 아이를 납치하는 어른의 모습이 훨씬 더 섬뜩했거든요. 그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이불을 꽉 쥐고 소리를 지를 뻔했을 정도입니다.

이 영화를 둘러싼 시각은 크게 둘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1. 재난 영화는 스펙터클이 핵심이라고 보는 시각: 화려한 CG와 영웅적 희생이 없으면 장르적 쾌감이 부족하다는 의견입니다. 실제로 아마겟돈이나 2012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그린랜드가 다소 답답하거나 소규모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2. 재난 속 인간 심리에 집중하는 시각: 극한 상황이 평범한 사람들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이 영화의 진짜 가치가 있다는 의견입니다. 이웃을 밀치고, 대피 팔찌를 빼앗으려 아이를 납치하고, 반면에 모르는 사람에게 슬며시 손을 내미는 장면들이 모두 이 시각을 지지합니다.

저는 두 번째 시각에 더 가깝습니다만, 첫 번째 시각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다만 제 경험상, 영화가 끝나고 불을 켰을 때 "지금 내가 따뜻한 방에서 엄마랑 숨 쉬고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영화는 흔치 않습니다.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공포 관리 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처럼, 죽음의 공포를 직면했을 때 오히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더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는 이론이 이 영화를 통해 실감 났습니다.

전망: 그린랜드가 남긴 질문들

영화의 후반부에서 가장 조용히 울컥했던 장면은 할아버지가 존에게 트럭 키를 건네는 순간이었습니다. 세상이 끝나가는 마당에 자신은 이곳에 남겠다고, 딸과 손자만 살아 돌아오면 된다고 말하는 그 장면에서 저는 엄마 손을 슬그머니 꼭 잡았습니다. 스펙터클 없이 조용히 이별을 택한 장면이었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선별 대피"라는 시스템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그 기준을 누가 정하고, 나는 그 기준에 들어갈 수 있는가. 미국 연방재난관리청(FEMA)의 국가 비상 대비 계획을 보면 실제로 재난 상황에서 우선 대피 대상자를 분류하는 기준이 존재합니다. 영화가 완전한 허구만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입니다.

속편에 대한 이야기도 들리는 상황이라, 이 세계관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지켜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속편이 단순히 스케일만 키운 블록버스터로 흘러갈지, 아니면 이번처럼 한 가족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결을 유지할지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화려한 액션이나 영웅 서사를 기대하셨다면 조금 실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자극적인 좀비물이나 히어로 영화에 조금 지치셨다면, 그린랜드는 꽤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 영화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별점을 굳이 매기자면 5점 만점에 4.2점 정도 드리고 싶습니다. 주말 저녁, 가까운 사람과 방 불 끄고 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댓글

가장 많이 본 글